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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eastorygame.top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어느 날 주말, 집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비를 보관한 방에 들어가니 배낭이 전부 찢어져 있다. 당시 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탓에 기념 현수막도 여러 개 제작해 갖고 있었는데 이 릴게임손오공 조차도 찢어져 있었다. 그가 참고, 참고, 참으면서 산줄기를 걸은 만큼 아내도 참고, 참고, 참으면서 살았다. 아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생때같은 아이들과 같이 보내야 할 주말을 산에 너무 많이 내어주고 있었다.
결국 1년간의 산행금지령. 가정에 충실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산이 잊히기는커녕 아무래도 산에 가야겠다. 그래서 가 릴짱 족의 스케줄을 최우선으로 하되, 남는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산을 오르고 왔다.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내는 처음엔 해가 지기 전에는 집에 오라고 제한을 걸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아이가 좀 자라기도 했고 주말 대신 평일에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조건으로 무제한 주말산행을 합의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걸었다. 기연 바다이야기#릴게임 도 만났다. 마침 산줄기 완주를 노리는 3명의 산꾼이 마지막 퍼즐이 되어줄 1명의 열정적인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주말 폭발적인 산행을 거듭했다.
수년이 지난 2025년 5월 17일. 부산의 어느 한 야산에서 그는 배낭과 등산복을 찢어버렸다. 아내가 그랬던 것과 똑같지만 이번에는 타의가 아니라 자의고, 산행이 금지된 것이 아니라 바다이야기룰 산행이 완성된 것을 의미했다.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 우리나라 산줄기를 다 걸었다. 도상거리로는 1만1,185.7km인 능선을 GPS 측정 상 1만3,391.7km로 걸었다. 심지어 40대다. 1979년생으로 뭇 산꾼들 사이에선 최연소 산줄기 완주자로 꼽히는 김남영씨다.
오션파라다이스게임산행을 취미로 하겠다고 마음 먹은 후 오른 첫 산, 봉화산을 오르는 김남영씨.
자전거 사고로 다리에 철심…그러자 산이 보였다
김씨의 고향은 경북 포항 남구 오천읍이다. 아버지가 포항제철에서 일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쭉 포항에서 살았다.
"어릴 때 운동이랑은 완전히 담 쌓고 살았어요. 그래도 운동 신경 자체는 나쁘지 않았죠. 초등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1등을 했더니 학교 대표로 멀리뛰기 주자를 한 적도 있어요. 순발력이 꽤 괜찮았거든요."
하지만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진로도 엇비슷한 가치관 하에 정해졌다. 사기업보단 공기업, 역동적인 직군보단 안정적인 것이 좋았다. 마침 시대도 하 수상한 때였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시국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세무 쪽 직업에서 눈을 낮춰 하향지원해 학생을 가르치는 쪽으로 바꿨다. 그 전엔 가르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엔 낯설었으나 막상 연차가 쌓일수록 일도 익숙해지고 만족하게 됐다.
흑석지맥 1구간.
강물처럼 잔잔하게 살고 있던 나날은 한 사고로 인해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2010년, 32세 나이에 자전거 사고가 났다. 자전거를 취미로 탄 것도 아니고 그저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고 있었을 뿐인데 부상이 심했다. 겨울에 오르막 급경사를 속도를 받아 오르려다가 얼음에 미끄러지면서 대퇴부가 골절됐다. 3개월은 꼼짝도 못 했고, 재활에 1년이 걸렸다. 그때 박은 철심은 지금도 그대로 다리에 남아 있다.
몸이 그렇게 되니 생활반경이 매우 비좁아졌다. 집과 학교만 오갔다. 그리고 두 공간에서도 많은 것이 제약됐다. 학교에선 목발 짚고 수업을 해야 했고, 담임도 못 맡고 교과수업만 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아직 아기인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놀아주지도 못했다. 늘 우울했던 시기다.
그러다 몸이 어느 정도 나을 때쯤, 학교에서 친목야유회를 가게 됐다. 단풍이 물든 설악산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목발을 짚고 걸어야 했는데 '이거다' 싶었다. 대청봉에 오르거나 설악산 심부에 들어선 건 아니고 그저 권금성 케이블카를 탔고, 외곽에 데크로 된 길을 따라 계곡 일부를 걸었을 뿐이지만 완쾌하면 산에 올라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왼쪽부터) 함께 산줄기 종주를 완주한 늘보, 산본리, 영숙 대장과 김남영씨.
"집 근처 서울 중랑구 봉화산(160m)부터 올랐어요. 그러면서 차츰 고도를 높였죠. 얕은 산인 남산이나 대모산을 오르고, 그 다음 500~600m급인 불암산과 수락산이었죠. 그 뒤에 북한산도 가고, 도봉산도 가고 하면서 서울권의 산을 끝냈어요. 그리고 경기도로 나갔죠."
혼자 간단한 하루 산행이었기에 그냥 편한 복장에 등산화만 하나 신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장비욕심은 없다. 인터넷에서 산행후기를 검색해 보고, 등산로가 잘 정돈돼 있고 경치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녔다.
닉네임은 '반바지'다. 산에 다니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늦은 계절까지 반바지를 입을 정도로 좋아하는 착장이다. 그만큼 더위를 많이 탄다.
경기도권의 산은 일단 대중교통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역 이름이 산 이름인 곳들을 그래서 가장 먼저 올랐고, 그 다음에는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산을 올랐다. 그러니 한계가 금방 왔다. 시골버스의 배차간격은 무시무시했다. 사람들이 산악회에 왜 가입해서 산을 가는지 깨달았다.
"또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죠. 그렇게 알아보니 백두대간이니 하는 새로운 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게 보면 볼수록 참 괜찮더라고요. 그동안은 혼자서 어떤 교통편을 타고 오고갈지, 어떤 코스로 오를지, 어떤 산을 갈지를 몽땅 결정해야 됐는데 그냥 백두대간 하나 딱 등록해 두면 매 주말 이 산악회만 줄곧 따라가면 되니 편할 것 같았어요."
팔공지맥 종주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게 2015년에 백두대간을 시작했다. 35구간으로 나눠 1년 6개월에 걸쳐 걸었다. 2016년 11월에 백두대간을 완주했다. 대간을 걷는 내내 너무 좋았다. 그간의 산행이 '찔끔'이었다면 이건 '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산행하는 이들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몇 번 같이 땀을 흘리니 무척 친해져서 한데 어울려 다니게 됐는데 그게 또 새로운 재미였다.
"완주하고 나니 참 감정이 벅차오르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설악산 구간을 진행할 땐 산행 초반 쐐기에 쏘여 가지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걷기 어려운 상황이 왔었어요.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한 베테랑 분이 원래라면 선두에 서는데 혼자 따로 나와서 저를 기다려서 끝까지 함께 데려가줬죠. 그런 기다림과 배려가 계속 대간을 걸어갈 힘을 줬었죠."
4명이서 벌인 속도전…7년 만에 지맥 완주
백두대간이 끝났다. 그러고 나니 누군가는 이젠 당일산행만 가끔 하겠다고 하고, 누구는 또 계속 더 걸을 만한 것이 없나 찾는다. 김씨는 산줄기 종주를 더 하고 싶다는 파였다. 다시 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9정맥이란 산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빨리 시작하는 정맥팀이 봉산악회에 있었다. 낙남정맥이었다.
호미지맥에서 산패작업을 하고 있다.
"정맥은 또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대간은 친목이 우선이었는데 여긴 전투였어요. 서로 쉬지도 않고, 대화도 안 하고 그저 무소의 뿔처럼 흔들림 없이 갑니다. 같이 뭉쳐 가지도 않고 자기 실력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갔어요. 그러니 저도 느긋하게 갈 수 없더라고요."
심지어 이때는 등산지도 앱의 존재를 모를 때라 오로지 앞서 가는 회원의 등만을 이정표로 삼아야 했다. 그러니 악착같이 따라가야 했다. 백두대간을 완주한 직후 주변에 "백두대간 완주해 봤냐?"고 으스대고 다녔던 것이 좀 민망해졌다. 산에 들어갈 때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게 됐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는 격이었죠. 그래도 열심히 따라가니 다리가 찢어지진 않고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그때 저는 30대였던지라 금세 등력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낙남정맥이 끝났다. 그런데 영 재미도 없고 경치도 별로 좋지 않았다. 남은 8개의 정맥도 이럴까 싶어 조금 흥미가 떨어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정맥 중에 낙남정맥이 말하자면 '가장 맛없는' 구간이란다. 맛없는 것부터 끝내놓으니 다른 정맥은 훨씬 재밌게 탈 수 있었다.
김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산꾼으로 산줄기 종주의 세계를 열어준 올빼미 산악회 질풍노도 회장을 꼽았다.
"이때쯤 정맥팀을 만드는 산악회도 더 이상 안 보이고 해서 우리끼리 해보자는 심산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모아서 올빼미 산악회란 걸 만들고 나머지 정맥을 시도했어요. 한 10명 정도 됐죠. 기맥도 병행하면서 한 5년 동안 열심히 완주, 완주했네요."
시간이 흘러 40대가 됐다. 그리고 뭇 40대들과 같은 고충을 안게 됐다. 그건 바로 취미와 가정 사이의 균형. 둘을 모두 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사실 지금까지 산행한 것도 따지자면 아내가 많이 참아준 덕이다. 가정에 헌신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잘 쌓아서 당일치기 산행과 교환했다. 이 시기에 기민하게 서울 근교 지맥을 30개 정도 후딱 해치웠다. 결국 그런 모습을 본 아내는 이렇게나 산에 가고 싶어 하는 남편을 또 한 번 참아주기로 했다. 자녀들에게는 주말에 여행이나 나들이를 좋아하는 아내의 유전자 대신 학창시절 얌전하고 내향적인 성격인 김씨의 유전자가 좀 더 많이 물려지기도 했다.
현재는 종주를 끝낸 후 등산화만 남기고 산행 장비 일체를 다 버린 상태라고 한다.
"지맥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때 기연을 만났죠. 늘보, 산본리, 영숙 대장님들이에요. 정말 산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인데 이분들이 마침 지맥 완주에 도전하고 있었어요. 매 주말마다 4명이서 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는 식으로 미친 듯이 다녔죠. 나이가 가장 어린 제가 항상 꼴찌였어요. 지금도요. 그만큼 체력이나 열정이 어마무시한 분들이었죠."
4명은 딱 경량속공을 펼치기에 좋은 인원 구성이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택시비를 나눠 내기도 좋았고, 차 한 대에 같이 타기도 좋았다. 또 의기투합하기도 좋았다. 네 명이서 만나면 늘 이 지맥은 어떻게 운행해서 끝내고, 오늘은 어디까지 걷고, 그 다음 지맥은 어디로 하고, 식량은 어떻게 조달할지 등 오로지 산줄기 종주 이야기만 나눴다. 그런 대화와 걸음을 7년 동안 꼬박 채우니 모든 산줄기 종주가 끝났다. 2025년 5월 17일 용천지맥이 마지막이었다. 배낭은 다 찢어져 있고, 스틱은 휘어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빨리 끝낼 생각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그저 앞에 세 분을 열심히 따라가는 데 급급했었던 것 같아요. 완주했을 때 기분이요? 정말 최고였죠. 홀가분하고, 기뻤어요. 아내가 저보다 더 기뻐하더라고요. 산줄기 완주만 끝내고 나면 무조건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산줄기 종주를 완주할 때 마지막 봉대산에서 '준희' 최남준 선생이 축하 차 방문했다.
지맥 고개, 봉우리에 산패 수천 개 달아
약 1만3,000km의 대장도. 당연히 사건사고도 많았다. 가지산에서는 여름에 비를 맞았다가 저체온증이 와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덜덜 떨면서 걷다가 가지산 무인산장 덕에 간신히 살 수 있었다. 그곳엔 장작과 라면이 비치돼 있었고, 양심껏 쓰고 돈을 넣으라고 돼 있었는데 라면 몇 개 먹고 바로 5만 원을 쾌척했다. 절대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그때 그러고도 끝까지 계획한 코스를 다 걸었어요. 장거리 종주를 하려면, 또 하게 되면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야만 또 다음 산줄기를 걸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동네 산 잠깐 오르내리는 걸로는 생기지 않는 바닥 밑의 체력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김씨는 스스로 "지구력과 심폐지구력이 엄청나게 떨어졌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산을 시작하기 직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산행을 시작하고 잔근육이 무척 늘었다. 그래서 이젠 산 대신 러닝을 시작해서 마라톤을 뛰고 있다. 풀코스를 4시간 정도 걸려 완주하는 실력이다.
김씨는 산행 도중 끊임 없이 지도를 확인하며 목표 달성에 열중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러닝도 재밌지만 역시 종주산행의 매력은 못 따라오는 것 같아요. 산에선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더 길게 가질 수 있거든요. 온 신경을 모아야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게 되게 매력적이에요."
그는 산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반대의 경험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잡념에 잠길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일체의 잡념 없이 오로지 산행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산행하면서 늘 현재의 지형과 위치를 살피고, 확인하고 단기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을 목표로 정하고, 달성하고 그 다음 방향을 생각하고, 운행 페이스를 점검한다. 그리고 모든 목표가 무사히 달성됐을 때 오는 희열과 쾌감이 예쁜 경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산줄기 완주란 목표가 달성되자 한결 후련해졌다. 이후 반 년, 지금껏 산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산줄기 종주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좀 더 특별하게 한 게 있어요. 산패작업을 몇 천 개 정도 했죠. 산에서 고개나 봉우리에 '준희'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산행리본을 여럿 만날 수 있잖아요? 저도 그와 비슷하게 코팅지에 지맥에 있는 여럿 고개와 봉우리의 이름을 적고 달아뒀어요. 분명히 지도상에는 고개 이름이 있고, 봉우리도 이름이나 적어도 해발고도쯤은 적혀 있기 마련인데 막상 실제로 그 지점에 가면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른 분들이 보고 '아, 여기가 거기구나.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한 작업입니다."
우리나라 산줄기 1만 3,000km를 다 걷고 난 뒤 어언 반 년. 그는 지금껏 산을 한 번도 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정을 더 우선하겠다는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기도 한데, 일단 몸이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산이란 언젠가는 가게 될 곳이라 미리 갔다 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산을 전혀 모르는 주변 또래가 산에 대해 물으면 같은 말을 돌려준다. 지금은 안 가도 나이가 들면 가게 될 것이라고. 산이란 그런 필연적인 곳이라고.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어느 날 주말, 집에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비를 보관한 방에 들어가니 배낭이 전부 찢어져 있다. 당시 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었던 탓에 기념 현수막도 여러 개 제작해 갖고 있었는데 이 릴게임손오공 조차도 찢어져 있었다. 그가 참고, 참고, 참으면서 산줄기를 걸은 만큼 아내도 참고, 참고, 참으면서 살았다. 아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생때같은 아이들과 같이 보내야 할 주말을 산에 너무 많이 내어주고 있었다.
결국 1년간의 산행금지령. 가정에 충실한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산이 잊히기는커녕 아무래도 산에 가야겠다. 그래서 가 릴짱 족의 스케줄을 최우선으로 하되, 남는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산을 오르고 왔다.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내는 처음엔 해가 지기 전에는 집에 오라고 제한을 걸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아이가 좀 자라기도 했고 주말 대신 평일에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조건으로 무제한 주말산행을 합의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걸었다. 기연 바다이야기#릴게임 도 만났다. 마침 산줄기 완주를 노리는 3명의 산꾼이 마지막 퍼즐이 되어줄 1명의 열정적인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주말 폭발적인 산행을 거듭했다.
수년이 지난 2025년 5월 17일. 부산의 어느 한 야산에서 그는 배낭과 등산복을 찢어버렸다. 아내가 그랬던 것과 똑같지만 이번에는 타의가 아니라 자의고, 산행이 금지된 것이 아니라 바다이야기룰 산행이 완성된 것을 의미했다.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 우리나라 산줄기를 다 걸었다. 도상거리로는 1만1,185.7km인 능선을 GPS 측정 상 1만3,391.7km로 걸었다. 심지어 40대다. 1979년생으로 뭇 산꾼들 사이에선 최연소 산줄기 완주자로 꼽히는 김남영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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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사고로 다리에 철심…그러자 산이 보였다
김씨의 고향은 경북 포항 남구 오천읍이다. 아버지가 포항제철에서 일했기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쭉 포항에서 살았다.
"어릴 때 운동이랑은 완전히 담 쌓고 살았어요. 그래도 운동 신경 자체는 나쁘지 않았죠. 초등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1등을 했더니 학교 대표로 멀리뛰기 주자를 한 적도 있어요. 순발력이 꽤 괜찮았거든요."
하지만 움직이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진로도 엇비슷한 가치관 하에 정해졌다. 사기업보단 공기업, 역동적인 직군보단 안정적인 것이 좋았다. 마침 시대도 하 수상한 때였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진 시국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세무 쪽 직업에서 눈을 낮춰 하향지원해 학생을 가르치는 쪽으로 바꿨다. 그 전엔 가르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엔 낯설었으나 막상 연차가 쌓일수록 일도 익숙해지고 만족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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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처럼 잔잔하게 살고 있던 나날은 한 사고로 인해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2010년, 32세 나이에 자전거 사고가 났다. 자전거를 취미로 탄 것도 아니고 그저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고 있었을 뿐인데 부상이 심했다. 겨울에 오르막 급경사를 속도를 받아 오르려다가 얼음에 미끄러지면서 대퇴부가 골절됐다. 3개월은 꼼짝도 못 했고, 재활에 1년이 걸렸다. 그때 박은 철심은 지금도 그대로 다리에 남아 있다.
몸이 그렇게 되니 생활반경이 매우 비좁아졌다. 집과 학교만 오갔다. 그리고 두 공간에서도 많은 것이 제약됐다. 학교에선 목발 짚고 수업을 해야 했고, 담임도 못 맡고 교과수업만 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아직 아기인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놀아주지도 못했다. 늘 우울했던 시기다.
그러다 몸이 어느 정도 나을 때쯤, 학교에서 친목야유회를 가게 됐다. 단풍이 물든 설악산이었다. 그때도 여전히 목발을 짚고 걸어야 했는데 '이거다' 싶었다. 대청봉에 오르거나 설악산 심부에 들어선 건 아니고 그저 권금성 케이블카를 탔고, 외곽에 데크로 된 길을 따라 계곡 일부를 걸었을 뿐이지만 완쾌하면 산에 올라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왼쪽부터) 함께 산줄기 종주를 완주한 늘보, 산본리, 영숙 대장과 김남영씨.
"집 근처 서울 중랑구 봉화산(160m)부터 올랐어요. 그러면서 차츰 고도를 높였죠. 얕은 산인 남산이나 대모산을 오르고, 그 다음 500~600m급인 불암산과 수락산이었죠. 그 뒤에 북한산도 가고, 도봉산도 가고 하면서 서울권의 산을 끝냈어요. 그리고 경기도로 나갔죠."
혼자 간단한 하루 산행이었기에 그냥 편한 복장에 등산화만 하나 신었을 뿐이었다. 지금도 장비욕심은 없다. 인터넷에서 산행후기를 검색해 보고, 등산로가 잘 정돈돼 있고 경치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녔다.
닉네임은 '반바지'다. 산에 다니면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늦은 계절까지 반바지를 입을 정도로 좋아하는 착장이다. 그만큼 더위를 많이 탄다.
경기도권의 산은 일단 대중교통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역 이름이 산 이름인 곳들을 그래서 가장 먼저 올랐고, 그 다음에는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산을 올랐다. 그러니 한계가 금방 왔다. 시골버스의 배차간격은 무시무시했다. 사람들이 산악회에 왜 가입해서 산을 가는지 깨달았다.
"또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죠. 그렇게 알아보니 백두대간이니 하는 새로운 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게 보면 볼수록 참 괜찮더라고요. 그동안은 혼자서 어떤 교통편을 타고 오고갈지, 어떤 코스로 오를지, 어떤 산을 갈지를 몽땅 결정해야 됐는데 그냥 백두대간 하나 딱 등록해 두면 매 주말 이 산악회만 줄곧 따라가면 되니 편할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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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15년에 백두대간을 시작했다. 35구간으로 나눠 1년 6개월에 걸쳐 걸었다. 2016년 11월에 백두대간을 완주했다. 대간을 걷는 내내 너무 좋았다. 그간의 산행이 '찔끔'이었다면 이건 '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같이 산행하는 이들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몇 번 같이 땀을 흘리니 무척 친해져서 한데 어울려 다니게 됐는데 그게 또 새로운 재미였다.
"완주하고 나니 참 감정이 벅차오르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설악산 구간을 진행할 땐 산행 초반 쐐기에 쏘여 가지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걷기 어려운 상황이 왔었어요.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한 베테랑 분이 원래라면 선두에 서는데 혼자 따로 나와서 저를 기다려서 끝까지 함께 데려가줬죠. 그런 기다림과 배려가 계속 대간을 걸어갈 힘을 줬었죠."
4명이서 벌인 속도전…7년 만에 지맥 완주
백두대간이 끝났다. 그러고 나니 누군가는 이젠 당일산행만 가끔 하겠다고 하고, 누구는 또 계속 더 걸을 만한 것이 없나 찾는다. 김씨는 산줄기 종주를 더 하고 싶다는 파였다. 다시 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9정맥이란 산줄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장 빨리 시작하는 정맥팀이 봉산악회에 있었다. 낙남정맥이었다.
호미지맥에서 산패작업을 하고 있다.
"정맥은 또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대간은 친목이 우선이었는데 여긴 전투였어요. 서로 쉬지도 않고, 대화도 안 하고 그저 무소의 뿔처럼 흔들림 없이 갑니다. 같이 뭉쳐 가지도 않고 자기 실력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갔어요. 그러니 저도 느긋하게 갈 수 없더라고요."
심지어 이때는 등산지도 앱의 존재를 모를 때라 오로지 앞서 가는 회원의 등만을 이정표로 삼아야 했다. 그러니 악착같이 따라가야 했다. 백두대간을 완주한 직후 주변에 "백두대간 완주해 봤냐?"고 으스대고 다녔던 것이 좀 민망해졌다. 산에 들어갈 때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게 됐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는 격이었죠. 그래도 열심히 따라가니 다리가 찢어지진 않고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그때 저는 30대였던지라 금세 등력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렇게 낙남정맥이 끝났다. 그런데 영 재미도 없고 경치도 별로 좋지 않았다. 남은 8개의 정맥도 이럴까 싶어 조금 흥미가 떨어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정맥 중에 낙남정맥이 말하자면 '가장 맛없는' 구간이란다. 맛없는 것부터 끝내놓으니 다른 정맥은 훨씬 재밌게 탈 수 있었다.
김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산꾼으로 산줄기 종주의 세계를 열어준 올빼미 산악회 질풍노도 회장을 꼽았다.
"이때쯤 정맥팀을 만드는 산악회도 더 이상 안 보이고 해서 우리끼리 해보자는 심산으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모아서 올빼미 산악회란 걸 만들고 나머지 정맥을 시도했어요. 한 10명 정도 됐죠. 기맥도 병행하면서 한 5년 동안 열심히 완주, 완주했네요."
시간이 흘러 40대가 됐다. 그리고 뭇 40대들과 같은 고충을 안게 됐다. 그건 바로 취미와 가정 사이의 균형. 둘을 모두 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사실 지금까지 산행한 것도 따지자면 아내가 많이 참아준 덕이다. 가정에 헌신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잘 쌓아서 당일치기 산행과 교환했다. 이 시기에 기민하게 서울 근교 지맥을 30개 정도 후딱 해치웠다. 결국 그런 모습을 본 아내는 이렇게나 산에 가고 싶어 하는 남편을 또 한 번 참아주기로 했다. 자녀들에게는 주말에 여행이나 나들이를 좋아하는 아내의 유전자 대신 학창시절 얌전하고 내향적인 성격인 김씨의 유전자가 좀 더 많이 물려지기도 했다.
현재는 종주를 끝낸 후 등산화만 남기고 산행 장비 일체를 다 버린 상태라고 한다.
"지맥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때 기연을 만났죠. 늘보, 산본리, 영숙 대장님들이에요. 정말 산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인데 이분들이 마침 지맥 완주에 도전하고 있었어요. 매 주말마다 4명이서 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는 식으로 미친 듯이 다녔죠. 나이가 가장 어린 제가 항상 꼴찌였어요. 지금도요. 그만큼 체력이나 열정이 어마무시한 분들이었죠."
4명은 딱 경량속공을 펼치기에 좋은 인원 구성이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택시비를 나눠 내기도 좋았고, 차 한 대에 같이 타기도 좋았다. 또 의기투합하기도 좋았다. 네 명이서 만나면 늘 이 지맥은 어떻게 운행해서 끝내고, 오늘은 어디까지 걷고, 그 다음 지맥은 어디로 하고, 식량은 어떻게 조달할지 등 오로지 산줄기 종주 이야기만 나눴다. 그런 대화와 걸음을 7년 동안 꼬박 채우니 모든 산줄기 종주가 끝났다. 2025년 5월 17일 용천지맥이 마지막이었다. 배낭은 다 찢어져 있고, 스틱은 휘어 있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빨리 끝낼 생각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그저 앞에 세 분을 열심히 따라가는 데 급급했었던 것 같아요. 완주했을 때 기분이요? 정말 최고였죠. 홀가분하고, 기뻤어요. 아내가 저보다 더 기뻐하더라고요. 산줄기 완주만 끝내고 나면 무조건 가정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산줄기 종주를 완주할 때 마지막 봉대산에서 '준희' 최남준 선생이 축하 차 방문했다.
지맥 고개, 봉우리에 산패 수천 개 달아
약 1만3,000km의 대장도. 당연히 사건사고도 많았다. 가지산에서는 여름에 비를 맞았다가 저체온증이 와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덜덜 떨면서 걷다가 가지산 무인산장 덕에 간신히 살 수 있었다. 그곳엔 장작과 라면이 비치돼 있었고, 양심껏 쓰고 돈을 넣으라고 돼 있었는데 라면 몇 개 먹고 바로 5만 원을 쾌척했다. 절대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그때 그러고도 끝까지 계획한 코스를 다 걸었어요. 장거리 종주를 하려면, 또 하게 되면 사람이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야만 또 다음 산줄기를 걸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동네 산 잠깐 오르내리는 걸로는 생기지 않는 바닥 밑의 체력이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김씨는 스스로 "지구력과 심폐지구력이 엄청나게 떨어졌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산을 시작하기 직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산행을 시작하고 잔근육이 무척 늘었다. 그래서 이젠 산 대신 러닝을 시작해서 마라톤을 뛰고 있다. 풀코스를 4시간 정도 걸려 완주하는 실력이다.
김씨는 산행 도중 끊임 없이 지도를 확인하며 목표 달성에 열중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러닝도 재밌지만 역시 종주산행의 매력은 못 따라오는 것 같아요. 산에선 오로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더 길게 가질 수 있거든요. 온 신경을 모아야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게 되게 매력적이에요."
그는 산에서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반대의 경험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잡념에 잠길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일체의 잡념 없이 오로지 산행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산행하면서 늘 현재의 지형과 위치를 살피고, 확인하고 단기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을 목표로 정하고, 달성하고 그 다음 방향을 생각하고, 운행 페이스를 점검한다. 그리고 모든 목표가 무사히 달성됐을 때 오는 희열과 쾌감이 예쁜 경치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산줄기 완주란 목표가 달성되자 한결 후련해졌다. 이후 반 년, 지금껏 산을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산줄기 종주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좀 더 특별하게 한 게 있어요. 산패작업을 몇 천 개 정도 했죠. 산에서 고개나 봉우리에 '준희' 선생님의 이름이 적힌 산행리본을 여럿 만날 수 있잖아요? 저도 그와 비슷하게 코팅지에 지맥에 있는 여럿 고개와 봉우리의 이름을 적고 달아뒀어요. 분명히 지도상에는 고개 이름이 있고, 봉우리도 이름이나 적어도 해발고도쯤은 적혀 있기 마련인데 막상 실제로 그 지점에 가면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른 분들이 보고 '아, 여기가 거기구나.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한 작업입니다."
우리나라 산줄기 1만 3,000km를 다 걷고 난 뒤 어언 반 년. 그는 지금껏 산을 한 번도 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가정을 더 우선하겠다는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기도 한데, 일단 몸이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산이란 언젠가는 가게 될 곳이라 미리 갔다 온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산을 전혀 모르는 주변 또래가 산에 대해 물으면 같은 말을 돌려준다. 지금은 안 가도 나이가 들면 가게 될 것이라고. 산이란 그런 필연적인 곳이라고.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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