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포쿠, 정력 강화를 과학으로 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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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반성규수 작성일26-01-21 23:00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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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포쿠, 정력 강화를 과학으로 증명하다
정력이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금기와 미신의 영역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정력을 민간요법이나 어설픈 음식에 맡기고, 또 누군가는 허무맹랑한 전통에 기대어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정력 강화도 이제는 검증의 시대입니다. 감이 아니라 수치로, 기분이 아니라 과학으로 말하는 시대.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독일 해포쿠가 있습니다.
해포쿠는 단순히 정력을 일시적으로 북돋우는 제품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구성된 포뮬러를 바탕으로 남성의 활력 메커니즘을 단계별로 복원하는 정통 기능성 보충제입니다. 특히 정력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단일한 자극이 아닌 호르몬 균형, 혈류 순환, 신경 안정이라는 세 축으로 분해해 전략적으로 접근한 것이 특징입니다.
첫 번째 핵심은 남성 호르몬의 균형 회복입니다. 중년 이후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해마다 1씩 감소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성 기능 저하뿐 아니라, 전반적인 기력 저하, 집중력 저하, 심리적 위축까지 연결됩니다. 해포쿠는 이 점을 겨냥해 마카, 아연, 비타민 B군, 토코페롤 등을 조합하여 체내 호르몬 분비를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전문가들은 이 조합이 신체 자생력 기반의 정력 강화에 적합하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혈류 개선입니다. 발기력은 결국 혈류 문제입니다. 충분한 혈액이 성기 내 해면체로 유입되어야 발기 지속 시간이 늘어나며, 강도 역시 달라집니다. 해포쿠에는 L아르기닌, L시트룰린, 홍삼 추출물이 포함되어 있어 혈관 이완과 산화질소 생산을 촉진합니다. 이는 혈류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여 기초 체력과 성기능의 상승 효과를 동시에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세 번째는 정신적 활력입니다. 아무리 신체 기능이 좋아도 스트레스에 눌려 있다면 반응은 무뎌집니다. 해포쿠는 아슈와간다, 감마 아미노부티르산GABA 등의 천연 성분을 통해 신경계를 안정시키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조절합니다. 이로 인해 성적인 자신감과 집중력이 회복되어 관계 전반에 긍정적인 효과를 줍니다.
이러한 과학적 기반은 단순히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해포쿠는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진행된 복수의 임상 테스트를 통해 실제 효과를 입증받았습니다. 12주 복용 테스트에서 참여자의 86가 발기력 향상, 79가 성욕 증가, 91가 전반적인 활력 개선을 경험했다고 보고했습니다. 특히 정력과 자존감을 동시에 회복했다는 피드백은 해포쿠의 다차원적 설계가 실제 생활에 효과적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사용 방법도 간단합니다. 하루 한 번, 공복에 물과 함께 복용하면 됩니다. 체내 흡수율을 높인 설계 덕분에 복용 후 1~2주 이내에 기초 체력 변화가 나타나며, 4주 이상 지속 시 성기능 개선과 함께 아침 활력, 정신적 에너지 증가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개인의 신체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해포쿠는 자극제가 아닌 생리 균형 회복제이기에 그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해포쿠의 안정성입니다. 독일 GMP 인증 생산시설에서 제조된 해포쿠는 모든 성분이 안전성과 효능 검증을 마쳤으며, 부작용 우려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장기 복용에도 무리가 없다는 뜻이며, 단기적인 자극보다는 지속적인 건강 관리가 필요한 현대 남성에게 적합한 선택입니다.
시장 반응 또한 이를 뒷받침합니다. 해포쿠는 현재 유럽 내 주요 건강보조식품 플랫폼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 중이며, 중년 남성 활력 솔루션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내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퍼지며, 몸이 달라졌다, 관계가 달라졌다,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해포쿠는 단순한 보충제를 넘어선 남성 라이프스타일의 동반자입니다. 관계에서의 자신감, 일상에서의 활력, 그리고 무엇보다 무너지지 않는 자존심을 원하는 남성에게 해포쿠는 과학적 근거 위에서 해답을 제시합니다.
누구에게나 정체기는 옵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느냐, 다시 도약하느냐입니다. 정력 강화를 검증된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해포쿠가 답입니다.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일시적 자극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회복으로.
당신의 정력, 해포쿠가 과학으로 증명합니다.지금 선택하십시오.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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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gamemong.info
후덕죽식 사고.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 이후 뜬 유행어다. ‘고수가 베푸는 양보 또는 아량’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음식 경연 프로그램에서 58년 경력의 76세 현역 요리사가 허드렛일 마다치 않고 뛰어다니는 장면에 수많은 시청자가 감동했고, 끝내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58년 경력의 76세 현역 요리사 후덕죽. 한국 중식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레전드다. 최근 종영한 '흑백요리사2'에 출연해 '후덕죽식 사고'라는 유행어마저 탄생시켰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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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공이 한국 중식의 산증인 후덕죽 사부다. 42년간 신라호텔 ‘팔선’의 대명사였고, 전설의 중화요리 '불도장'을 개발한 주인공이며, 현재는 2024∼2025년 이태 연속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호빈’의 총괄 셰프다. 쉽게 말해 역대 화교 요리사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후 릴박스 사부의 '흑백요리사2' 출연은 전혀 뜻밖이었다. 반세기 넘도록 한국 중식계의 지존으로 활약하면서도 언론과의 접촉은 극도로 삼갔기 때문이다. 절세무공의 은둔 고수가 ‘먹방’ 판치는 강호로 나온 셈이어서 첫 질문은 당연히 하산의 이유여야 했다.
Q : 수십 년간 언론을 멀리했는데 '흑백요리사2'는 어쩌다 출연하게 됐나. A : ‘팔선’에 바다이야기디시 있을 때는 긴장하며 대기할 때가 많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흑백요리사2'도 한 달을 거절하다가 승낙했다. 후배에게 귀감 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화면에 얼굴 한번 비치는 정도'로 생각했다가 거의 끝까지 갔다.
Q : 단체전에서 최고령 셰프가 주방 막내가 하는 일을 했다. '천하의 후덕죽'이 마늘을 다지고 참외를 절였다. A 바다이야기하는법 : 축구를 하면 누구나 골을 넣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두가 공격수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수비수가 돼 골문을 지켜야 한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주방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Q : 임성근 셰프가 후 사부 칼을 썼다. A :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빨리 요리를 마무리하는 게 중요했다. 쓰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야마토통기계
Q : '팔선'에선 엄한 요리사로 유명했었는데, 방송에선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나왔다. A : 지금도 주방에선 상당히 엄하다. 요즘도 영업시간 전에 양념통 위치가 제대로 돼 있는지 돌아다니며 확인한다. 방송에서 다르게 보인 건, 함께한 셰프가 다 쟁쟁해서다.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했다.
Q : 젊은 셰프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A : 손종원·정호영·샘킴 다 잘하는 셰프들이다. '요리괴물'은 오해를 받은 부분이 있는데, 같이 있을 때 굉장히 순했다. 손종원 셰프는 요리하는 자세가 부드러웠고 성품도 좋았다. 박효남 셰프가 감자를 돌려 깎은 장면을 기억하나? 요즘 젊은 셰프는 그런 걸 잘 모른다. 식재료가 다 손질해서 들어와서다. 박 셰프는 손가락 한 개가 없는 손으로 그런 기술을 습득했다.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일했다.
Q : '당근 지옥' 편도 크게 화제가 됐다. 5가지 당근 요리를 했는데 준비한 것인가. A : 다 즉흥이었다. 음식이 떠오르면 바로 만들었다. 재료 하나로 30분 만에 요리를 하나씩 완성해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맨 마지막 '어향당근'을 만들었을 때가 새벽 네다섯 시였다. 피곤한지도 모르고 요리를 만들었다. 더 하라고 했어도 할 수 있었다.
후덕죽 셰프를 전설로 만든 손. 손이 작고 손가락이 뭉툭했다. 강정현 기자
Q : '당근 지옥'의 주인공은 단연 '당근짜장면'이었다. 어떻게 나왔나. A : 처음엔 국수를 만들려고 했는데, 마땅한 소스를 못 찾았다. 겨우 찾아낸 게 춘장이어서 짜장면으로 바꿨다. 면처럼 채 썬 당근은 삶지 않았다. 쪘다. 나는 삶는 것보다 찌는 걸 선호한다. 찌면 맛과 모양이 살아서다. 당근을 찐 건 처음이었는데, 딱 5분만 찐 게 맞아떨어졌다.
Q : 춘장에 미소된장을 넣은 게 특이했다. 보통은 쌈장을 추가한다. A : 하나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팔선' 때부터 짜장면을 만들 때 춘장에 미소된장을 넣었다. 예전부터 내 짜장면은 먹어도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 비결이 미소된장이다.
Q : 결승전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였다. 결승에 진출했다면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가. A : 솔직히 결승에 올라갈 줄 알았다. 대결 음식을 준비했고, 재료도 갖고 갔다. 불도장을 하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이니까. 새로운 스타일의 중국 황실 불도장을 선보이고 싶었는데 아쉽다.
후덕죽 셰프가 '호빈' 주방에서 웍을 잡았다. 후 셰프는 "중식 요리사는 불과 웍을 두고 싸워야 해서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Q : 어릴 적 얘기를 하자. 무척 가난했다고 들었다. A : 부모님은 중국 산둥(山東) 출신으로, 광복 이후 넘어왔다. 나는 서울 서소문동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중1 때 돌아가셨다. 그 뒤로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 집에서 얹혀살았다.
Q : 요리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 A : 홀로 남은 어머니가 '사하원'이라는 중국집을 했었다. 주방장이 웍 돌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 몰래 주방을 들락거렸다. 된통 혼난 적도 있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알려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볶음밥을 만들어 형 누나 도시락을 싸줬다. 조리사의 길을 걸은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다. UN센터호텔 주방에서 허드렛일하며 시작했다.
Q : 중식 커리어는 '용궁'에서 시작했다. A : UN센터호텔 주방은 양식이었다. 중식을 배우고 싶어 무작정 '용궁'을 찾아갔다. 용궁은 당시 최고급 중식당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거절당했다. 다시 찾아갔고 또 거절당했다. 그렇게 몇 달을 찾아가니까 받아줬다. 내 끈기를 좋게 봐줬던 게다. 주방에 빈자리가 없었는데도 받아줬다. 주방장 빨래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버텼다. 쉬는 날이 있었지만 선배들 눈치 보느라 일만 했다.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하나라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엔 월급도 없었다. 4개월째 첫 월급을 받았는데 2만원으로 기억한다.
Q : 그 시절엔 요리사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고 들었다. A : 결혼하기 전 장모님께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바로 쫓겨났었다. ‘남자가 무슨 조리사냐’며 요리사가 굉장히 푸대접받던 시대다. 결국 식구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단둘이 식을 올렸다.
1995년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앞자리 오른쪽) 내외와 후덕죽 셰프(뒷자리 가운데). 사진 후덕죽
Q : 신라호텔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A : 반도호텔이 문을 닫아 누나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중국집에서 일하며 광둥 요리를 배웠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 중식은 산둥 요리가 중심이어서 광둥 요리를 처음 접했다. 비자 때문에 들어왔다가 눌러앉았다. 마침 신라호텔이 문을 열어 개관 멤버로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뒤 '팔선'을 열었다. 처음엔 부주방장이었으나 바로 주방장이 됐다.
Q : '팔선' 시절 장쩌민(江泽民) 중국 전 주석의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A : 95년 중국 주석 최초로 장쩌민 주석이 방한했다. 서울신라호텔에 묵었는데, 서울 일정뿐 아니라 제주도 일정까지 따라가 음식을 만들었다. 장 주석이 한국을 떠나기 전 객실로 나를 불러 '중국 본토 요리보다 훌륭했다'며 기념사진도 찍어줬다.
Q : '팔선'의 또 다른 전설이 불도장이다.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 A : 요리사로서 최고의 정점을 찍은 건 94년 주방 출신 최초로 상무로 승진했을 때다. 불도장 덕분이었다. 87년 사회가 혼란했을 때 개발한 신메뉴였는데, 신라호텔이 국내 호텔 1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 삼성전자가 아니라 '팔선전자'란 말이 돌 정도였다.
Q : 긴 세월 삼성가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A : 이병철, 이건희 회장 모두 입맛이 소박했다. 귀하고 비싼 음식보다 짜장면·탕수육 같은 평범한 음식을 더 좋아했다. 특히 이병철 회장은 소식가였다. 식사하는 모습도 항상 조용하고 점잖았다. 이병철 회장이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일본에서 약선요리를 배워 만들어준 적이 있다.
후덕죽 셰프를 상징하는 메뉴는 단연 불도장이다. 중국 최고급 보양식인 불도장을 1987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호빈'에서도 인기 메뉴다. 사진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후 사부가 인터뷰에서 강조한 사자성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의식동원(醫食同源).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뜻이다. 후 사부가 이병철 회장에 해준 약선요리도, 몸에 좋은 재료가 가득한 불도장도 그 철학에서 나온 음식이다. 후 사부는 평생 화학조미료는 물론이고 약품으로 색을 낸 재료도 안 썼다고 강조했다.
다른 하나는 상경하애(上敬下愛)다. 윗사람은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사랑해주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부하에게 시키지 말라"고 교육한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팔순을 바라보는 노장이 마늘을 다졌나 보다. 후 사부가 일하는 호빈은 5월까지 예약이 마감됐다. 가끔 '당근딤섬'을 이벤트 삼아 내기도 한단다.
■ 더중앙플러스-이런 기사도 있어요
「 "아쉬운 그 눈 모양, 후덕죽에겐 최고" 인상학자의 분석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97226 」
■ 후덕죽(侯德竹)
「
후덕죽 셰프가 16일 오후 앰베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1949년 3월 서울 서소문동에서 태어났다. 68년 서울 UN센터호텔에서 조리사 생활을 시작했고, 72년 반도호텔 ‘용궁’에서 중식 조리를 배웠다. 일본 유학 후 77년 호텔신라 개관 멤버로 합류했고, 이태 뒤 서울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의 주방장을 맡았다. 87년 불도장(佛跳牆)을 국내에 처음 선보였고, 94년 조리사 최초로 호텔신라 임원(조리총괄 이사)에 올랐다. 2019년 42년간의 팔선 생활을 뒤로하고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의 ‘허우’로 옮겼다. 2022년부터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호빈’을 지휘하고 있다. 」
손민호·백종현 기자
58년 경력의 76세 현역 요리사 후덕죽. 한국 중식의 산증인으로 통하는 레전드다. 최근 종영한 '흑백요리사2'에 출연해 '후덕죽식 사고'라는 유행어마저 탄생시켰다.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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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인공이 한국 중식의 산증인 후덕죽 사부다. 42년간 신라호텔 ‘팔선’의 대명사였고, 전설의 중화요리 '불도장'을 개발한 주인공이며, 현재는 2024∼2025년 이태 연속 미쉐린 1스타를 받은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호빈’의 총괄 셰프다. 쉽게 말해 역대 화교 요리사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후 릴박스 사부의 '흑백요리사2' 출연은 전혀 뜻밖이었다. 반세기 넘도록 한국 중식계의 지존으로 활약하면서도 언론과의 접촉은 극도로 삼갔기 때문이다. 절세무공의 은둔 고수가 ‘먹방’ 판치는 강호로 나온 셈이어서 첫 질문은 당연히 하산의 이유여야 했다.
Q : 수십 년간 언론을 멀리했는데 '흑백요리사2'는 어쩌다 출연하게 됐나. A : ‘팔선’에 바다이야기디시 있을 때는 긴장하며 대기할 때가 많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흑백요리사2'도 한 달을 거절하다가 승낙했다. 후배에게 귀감 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화면에 얼굴 한번 비치는 정도'로 생각했다가 거의 끝까지 갔다.
Q : 단체전에서 최고령 셰프가 주방 막내가 하는 일을 했다. '천하의 후덕죽'이 마늘을 다지고 참외를 절였다. A 바다이야기하는법 : 축구를 하면 누구나 골을 넣고 싶어한다. 그러나 모두가 공격수가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수비수가 돼 골문을 지켜야 한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주방에서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Q : 임성근 셰프가 후 사부 칼을 썼다. A : 얼마나 급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빨리 요리를 마무리하는 게 중요했다. 쓰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야마토통기계
Q : '팔선'에선 엄한 요리사로 유명했었는데, 방송에선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나왔다. A : 지금도 주방에선 상당히 엄하다. 요즘도 영업시간 전에 양념통 위치가 제대로 돼 있는지 돌아다니며 확인한다. 방송에서 다르게 보인 건, 함께한 셰프가 다 쟁쟁해서다. 그들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했다.
Q : 젊은 셰프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 A : 손종원·정호영·샘킴 다 잘하는 셰프들이다. '요리괴물'은 오해를 받은 부분이 있는데, 같이 있을 때 굉장히 순했다. 손종원 셰프는 요리하는 자세가 부드러웠고 성품도 좋았다. 박효남 셰프가 감자를 돌려 깎은 장면을 기억하나? 요즘 젊은 셰프는 그런 걸 잘 모른다. 식재료가 다 손질해서 들어와서다. 박 셰프는 손가락 한 개가 없는 손으로 그런 기술을 습득했다. 우리 세대는 다 그렇게 일했다.
Q : '당근 지옥' 편도 크게 화제가 됐다. 5가지 당근 요리를 했는데 준비한 것인가. A : 다 즉흥이었다. 음식이 떠오르면 바로 만들었다. 재료 하나로 30분 만에 요리를 하나씩 완성해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맨 마지막 '어향당근'을 만들었을 때가 새벽 네다섯 시였다. 피곤한지도 모르고 요리를 만들었다. 더 하라고 했어도 할 수 있었다.
후덕죽 셰프를 전설로 만든 손. 손이 작고 손가락이 뭉툭했다. 강정현 기자
Q : '당근 지옥'의 주인공은 단연 '당근짜장면'이었다. 어떻게 나왔나. A : 처음엔 국수를 만들려고 했는데, 마땅한 소스를 못 찾았다. 겨우 찾아낸 게 춘장이어서 짜장면으로 바꿨다. 면처럼 채 썬 당근은 삶지 않았다. 쪘다. 나는 삶는 것보다 찌는 걸 선호한다. 찌면 맛과 모양이 살아서다. 당근을 찐 건 처음이었는데, 딱 5분만 찐 게 맞아떨어졌다.
Q : 춘장에 미소된장을 넣은 게 특이했다. 보통은 쌈장을 추가한다. A : 하나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팔선' 때부터 짜장면을 만들 때 춘장에 미소된장을 넣었다. 예전부터 내 짜장면은 먹어도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 비결이 미소된장이다.
Q : 결승전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였다. 결승에 진출했다면 어떤 요리를 하고 싶은가. A : 솔직히 결승에 올라갈 줄 알았다. 대결 음식을 준비했고, 재료도 갖고 갔다. 불도장을 하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음식이니까. 새로운 스타일의 중국 황실 불도장을 선보이고 싶었는데 아쉽다.
후덕죽 셰프가 '호빈' 주방에서 웍을 잡았다. 후 셰프는 "중식 요리사는 불과 웍을 두고 싸워야 해서 항상 긴장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
Q : 어릴 적 얘기를 하자. 무척 가난했다고 들었다. A : 부모님은 중국 산둥(山東) 출신으로, 광복 이후 넘어왔다. 나는 서울 서소문동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중1 때 돌아가셨다. 그 뒤로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 집에서 얹혀살았다.
Q : 요리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 A : 홀로 남은 어머니가 '사하원'이라는 중국집을 했었다. 주방장이 웍 돌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 몰래 주방을 들락거렸다. 된통 혼난 적도 있지만, 주방장이 요리를 알려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볶음밥을 만들어 형 누나 도시락을 싸줬다. 조리사의 길을 걸은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다. UN센터호텔 주방에서 허드렛일하며 시작했다.
Q : 중식 커리어는 '용궁'에서 시작했다. A : UN센터호텔 주방은 양식이었다. 중식을 배우고 싶어 무작정 '용궁'을 찾아갔다. 용궁은 당시 최고급 중식당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거절당했다. 다시 찾아갔고 또 거절당했다. 그렇게 몇 달을 찾아가니까 받아줬다. 내 끈기를 좋게 봐줬던 게다. 주방에 빈자리가 없었는데도 받아줬다. 주방장 빨래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버텼다. 쉬는 날이 있었지만 선배들 눈치 보느라 일만 했다.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하나라도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엔 월급도 없었다. 4개월째 첫 월급을 받았는데 2만원으로 기억한다.
Q : 그 시절엔 요리사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고 들었다. A : 결혼하기 전 장모님께 처음 인사하러 갔을 때 바로 쫓겨났었다. ‘남자가 무슨 조리사냐’며 요리사가 굉장히 푸대접받던 시대다. 결국 식구 모두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단둘이 식을 올렸다.
1995년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앞자리 오른쪽) 내외와 후덕죽 셰프(뒷자리 가운데). 사진 후덕죽
Q : 신라호텔은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A : 반도호텔이 문을 닫아 누나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중국집에서 일하며 광둥 요리를 배웠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 중식은 산둥 요리가 중심이어서 광둥 요리를 처음 접했다. 비자 때문에 들어왔다가 눌러앉았다. 마침 신라호텔이 문을 열어 개관 멤버로 들어갔다. 그리고 2년 뒤 '팔선'을 열었다. 처음엔 부주방장이었으나 바로 주방장이 됐다.
Q : '팔선' 시절 장쩌민(江泽民) 중국 전 주석의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A : 95년 중국 주석 최초로 장쩌민 주석이 방한했다. 서울신라호텔에 묵었는데, 서울 일정뿐 아니라 제주도 일정까지 따라가 음식을 만들었다. 장 주석이 한국을 떠나기 전 객실로 나를 불러 '중국 본토 요리보다 훌륭했다'며 기념사진도 찍어줬다.
Q : '팔선'의 또 다른 전설이 불도장이다. 어떻게 개발하게 됐나. A : 요리사로서 최고의 정점을 찍은 건 94년 주방 출신 최초로 상무로 승진했을 때다. 불도장 덕분이었다. 87년 사회가 혼란했을 때 개발한 신메뉴였는데, 신라호텔이 국내 호텔 1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 삼성전자가 아니라 '팔선전자'란 말이 돌 정도였다.
Q : 긴 세월 삼성가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A : 이병철, 이건희 회장 모두 입맛이 소박했다. 귀하고 비싼 음식보다 짜장면·탕수육 같은 평범한 음식을 더 좋아했다. 특히 이병철 회장은 소식가였다. 식사하는 모습도 항상 조용하고 점잖았다. 이병철 회장이 건강이 안 좋았을 때 일본에서 약선요리를 배워 만들어준 적이 있다.
후덕죽 셰프를 상징하는 메뉴는 단연 불도장이다. 중국 최고급 보양식인 불도장을 1987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 현재 몸담고 있는 '호빈'에서도 인기 메뉴다. 사진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후 사부가 인터뷰에서 강조한 사자성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의식동원(醫食同源). 약과 음식은 근원이 같다는 뜻이다. 후 사부가 이병철 회장에 해준 약선요리도, 몸에 좋은 재료가 가득한 불도장도 그 철학에서 나온 음식이다. 후 사부는 평생 화학조미료는 물론이고 약품으로 색을 낸 재료도 안 썼다고 강조했다.
다른 하나는 상경하애(上敬下愛)다. 윗사람은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사랑해주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부하에게 시키지 말라"고 교육한다고 했다. 그 마음으로 팔순을 바라보는 노장이 마늘을 다졌나 보다. 후 사부가 일하는 호빈은 5월까지 예약이 마감됐다. 가끔 '당근딤섬'을 이벤트 삼아 내기도 한단다.
■ 더중앙플러스-이런 기사도 있어요
「 "아쉬운 그 눈 모양, 후덕죽에겐 최고" 인상학자의 분석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97226 」
■ 후덕죽(侯德竹)
「
후덕죽 셰프가 16일 오후 앰베서더 서울 풀만 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1949년 3월 서울 서소문동에서 태어났다. 68년 서울 UN센터호텔에서 조리사 생활을 시작했고, 72년 반도호텔 ‘용궁’에서 중식 조리를 배웠다. 일본 유학 후 77년 호텔신라 개관 멤버로 합류했고, 이태 뒤 서울신라호텔 중식당 ‘팔선’의 주방장을 맡았다. 87년 불도장(佛跳牆)을 국내에 처음 선보였고, 94년 조리사 최초로 호텔신라 임원(조리총괄 이사)에 올랐다. 2019년 42년간의 팔선 생활을 뒤로하고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의 ‘허우’로 옮겼다. 2022년부터 앰배서더 서울 풀만 호텔 ‘호빈’을 지휘하고 있다. 」
손민호·백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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