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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넘기고서야 소리를 번 읽자면 그런 도와줄게.민청련동지회에는 민청련 활동 중 정권으로부터 당한 폭압의 결과로 활동 중 혹은 그 이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이 있다. 그 분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민주항쟁 정신의 계승에 작으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민청련 두꺼비 열전]을 편찬한다.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 아닌, 무명의 헌신을 실천한 이들을 위주로 한다.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열정을 보여주는 삶의 스토리를 통해 민주항쟁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말>
[권형택]
검증완료릴게임
▲ 평생 동지였던 김선택(왼쪽)과 장준영(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야마토통기계
민청련은 1983년 9월에 창립했는데, 김선택은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운동권이 극소수였던 서강대 출신 김선택은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83년 말쯤 선택은 장준영으로부터 처음으로 민청련 참여를 권유받았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편집위원이 되다
골드몽사이트 장준영은 성균관대 내부 논의를 거쳐 민청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서강대는 어떻게 할 건지 선택에게 물었다. 선택은 서강대는 형편상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약칭 민길)' 편집진에 들어갔다.
민길 1호가 처음 발간된 것은 1984년 1월쯤 무료릴게임 이었는데, 선택이 민길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7월 민길 4호 발간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민길은 진재학(서울대 77학번)이 팀장이었고, 백현기(국민대 74학번)가 팀원으로 있었고, 김희상(성균관대 73학번)이 중앙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와 있었다. 선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과 인연을 이어갔다. 선택은 주로 경제관계 정세분석을 담당했다. 선 야마토게임 택은 민길팀에서 1985년 말까지, 대략 13호 발행 때까지 일했다.
1985년 6월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구속되고, 9월 초에 김근태 의장과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구속되면서 민청련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최민화 부의장 등 간부 5명이 추가로 구속되고, 김희택, 박우섭 등 간부들 모두에게 수배령이 떨어져 민청련은 공개적인 활동이 중단되고,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민길도 사실상 발행 중단이 되었다.
활동 중단으로 답답하게 지내던 중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풀리고 9월에 총회를 열어 김희택 의장을 중심으로 공개활동이 복원되었다. 민청련은 12월 대통령선거 때까지 지역지부 건설과 선거국면의 정치투쟁이라는 내외 양면에서 적극적인 황동을 펼쳤는데, 선택은 이때 공개적인 직함을 맡지는 않았지만 다시 회원으로서 민청련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가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나자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던 민통련이 혼란에 빠졌다. 지도부가 총사퇴했고, 산하조직도 분열되었으며, 실무진도 대거 그만두어 공백이 생겼다. 민청련도 김희택 의장 등 의장단이 총사퇴하고 2월에 총회를 열어 김성환 의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됐다.
▲ 2012년 3월 인재근 선배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 김선택(중앙)은 민청련동지들과 함께 응원 방문했다.
ⓒ 민청련동지회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 천생 배필 권미혁
이때 선택은 민청련보다 상위의 연합단체인 민통련을 정상화하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통련의 중간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등은 아직 감옥에 있었고, 정책실장 대행 역할을 하던 김병곤은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이창복 의장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민청련의 '삼택'이 나섰다. 김희택이 민통련 사무처장으로, 김선택이 정책실 차장으로, 권형택이 사무차장으로 이창복 의장을 모시고 민통련 재건에 나섰다. 김선택은 또한 통일운동에 몰두하고 있던 문익환 목사를 모시고 민통련 통일위원회를 꾸렸다. 통일위원회에는 문 목사 이외에도 김낙중, 노중선, 전창일 선생 등이 있었다.
그러다 1988년에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가 출소하면서 새로운 연하단체 조직 논의가 일어나 결국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창립했다. 선택은 민통련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새로운 연합체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셈이었다.
1988년 10월 선택이 민통련에 근무할 때였다. 민청련 후배 이정심이 선택을 찾아와 물었다. "형 장가갈 거야?" "야! 그러지 않아도 집에서 장가가라고 난리야." "알았어요." 그러고나서 얼마 안 있어 11월 3일 이정심이 성대 앞 장미다방에서 권미혁과 자리를 마련했다. 미혁도 민청련 여성부 활동을 했으니 전부터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미혁은 이화여대 77학번으로 선택보다 4살 아래였고, 민청련 여성부를 나와 여성민우회에서 상근으로 여성운동을 하고 있었다. 첫날은 술 한 잔 하고 헤어졌고, 그 후에 선택이 한 두 번 더 만나보니 '말이 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선택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더 만나면 소문이 날 텐데 나이 들어서 무슨 창피냐. 난 당신이 좋으니까. 결혼합시다."
그랬더니 미혁이 깜짝 놀라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두 번 더 만났는데 한 달을 못 채우고 11월 말에 미혁으로부터 좋다는 답을 들었다.
선택과 미혁은 12월 초에 만나서 결혼하기로 최종합의하고 한 달간 준비한 끝에 1989년 1월 15일 문익환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문익환 목사는 친필로 쓴 글을 표구한 액자 2개를 선물로 주었다. 선택 미혁 부부는 미아리 선택의 집에서 신접살림을 꾸렸다.
▲ 신혼 초 김선택 권미혁 부부
ⓒ 민청련동지회
아내를 위해 '내조'한 민주적 남편
미혁은 건강이 안 좋아 결혼 초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동안 여성운동에 몰두하느라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쉴 틈이 없이 활동에 매진했고 결국 그 바람에 첫 애를 임신했으나 유산을 했고, 그 유산 후유증에 오래 시달렸다.
선택은 선택대로 신혼 초에 전민련 창립식이 있어, 민통련을 정리하고 새로운 단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민련은 창립된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89년 4월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정부당국으로부터 된서리를 맡게 된다. 문익환 목사뿐만 아니라 전민련 간부 이부영, 이재오, 김근태 등이 모두 구속되어 전민련이 기능마비 상태에 빠졌다. 김선택은 이번에도 이창복 공동대표를 모시고 장준영, 권형택 등과 함께 전민련을 지키고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선택은 모교 후배 김기설의 투신 항거와 그에 뒤이은 유서대필사건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운동권'의 뒤치다꺼리 전담요원 역할을 했다. 선택의 이러한 남 뒷바라지 잘하는 기질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아내 권미혁이 여성운동가 할당의 일환으로 민주당 비례대표에 나가게 되었다. 선택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정치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여서 미혁의 정계 진출을 적극 응원했다.
당시 국회의원 비례대표는 중앙에서 후보자의 당선 가능성 번호를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자끼리 경선하여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투표에 의해 순번이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미혁은 11번을 받아 당선안정권 내에 들었다. 이 과정에서 선택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마침내 2016년 5월 미혁은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입성했다.
선택의 뒷바라지 대상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백송을 지극히 사랑하여 묘목을 들여다 정성껏 가꾸었다. 그리고 자란 묘목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무 뒷바라지까지 해준 선택이었다.
발병, 헌신적 간호 속에 세상을 떠나다
평생 남을 위한 일만 하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일까. 선택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2016년 무렵 꽃가루 알러지가 심해서 천안의 한 병원에 갔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미혁이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해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상태가 심각하다.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병명이 대동맥류라고 하는데 뇌동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어 그 약한 부분이 터지면 즉사할 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다. 게다가 선택은 세 군데나 대동맥류가 생겨 있었고, 모두 70% 이상이 막혀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8월에 날을 잡아 18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선택은 중환자실을 나와 의식을 회복하고, 통원치료를 하며 몇 달간 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다.
그런데 몇 달 후 심한 장출혈로 병원에 재입원했다. 응급조치를 받아 겨우 장출혈이 치료되자 이번엔 폐렴이 찾아왔다. 결국 선택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는 치료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내 미혁은 선택이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고향 근처의 병원으로 옮기고, 직접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간호했다. 이때 선택의 선후배 동지인 김재승, 장준영, 정경연, 노재익, 서경미 또한 매일 선택의 곁을 지키며 호전을 빌었다.
한때는 상태가 호전되어서 미혁이 선택을 휠체어에 태우고 문익환 목사 자택에 개관한 '문익환 통일의 집'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민청련 동지 장영달, 이명식을 본 선택은 하염없이 울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동지들을 보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러나 운명은 결국 평생 남을 위해 뒷바라지 해온 선택을 뒷바라지 해주지 않았다. 2020년 9월 18일, 선택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선택의 유해는 문익환, 김근태, 김병곤 등 민주화운동의 선배들이 묻혀 있는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문익환 목사님 묘소 바로 옆에 있는 선택의 묘 앞에는 함세웅 신부님이 친필로 쓴 '맑은 영혼 김선택'이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김선택 묘. 문익환 목사 묘 옆이다.
ⓒ 민청련동지회
맑은 영혼, 김선택
김선택 한 번도 관직에 앉아본 적이 없이 순수 재야의 길을 걸었다. 항상 원칙을 중시했고, 운동이 지향하는 철학을 삶의 마지막까지 견지하려고 했다. 그 철학의 핵심은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아내 미혁이 바라보는 남편 김선택은 '모든 면에서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고 늘 대화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선택은 아이를 무척 좋아해서 아이를 여럿 낳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혁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자, 미혁이 상처 받을까봐 일체 그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선택은 소를 키우는 농부처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새벽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새벽 3, 4시면 일어나 주위 사람을 두들겨 깨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아기 같은 심성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맑은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심성을 다스리는 공부도 많이 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불경을 사경하고, 경전을 읽고 공부했다. 그래서 선택이 평생 친형님처럼 모시고 의지했던 장준영은 선택을 "좋은 친구이면서 좋은 스승 같은 사람, 내 잘못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면서도 때로 야단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택은 주변의 선후배들에게 사랑과 아낌을 듬뿍 받은 사람이었다. 순천향병원 입원 기간 3년 반 동안 매일 빠짐없이 누군가가 선택을 병문안 왔다. 친지도 있었지만 주로 선후배 동료들이었다. 이해찬 전 장관, 박원순 시장도 면회를 왔고,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경우 2번이나 면회를 왔다. 그래서 가족들은 가슴으로 느꼈다.
'내 동생, 우리 오빠가 정말 잘 살았구나'.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 민청련 두꺼비들 김근태, 이을호, 김병곤, 백완승, 이범영, 박혜숙, 박문숙, 최민화, 김선택 9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이로써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아직도 민주의 제단에 바쳐진 많은 무명의 영혼들이 있습니다. 더 잘 준비해서 2부로 돌아오겠습니다. 기자 admin@seastorygame.top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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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동지였던 김선택(왼쪽)과 장준영(오른쪽)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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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1983년 9월에 창립했는데, 김선택은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운동권이 극소수였던 서강대 출신 김선택은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983년 말쯤 선택은 장준영으로부터 처음으로 민청련 참여를 권유받았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편집위원이 되다
골드몽사이트 장준영은 성균관대 내부 논의를 거쳐 민청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서강대는 어떻게 할 건지 선택에게 물었다. 선택은 서강대는 형편상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약칭 민길)' 편집진에 들어갔다.
민길 1호가 처음 발간된 것은 1984년 1월쯤 무료릴게임 이었는데, 선택이 민길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7월 민길 4호 발간을 준비하던 때였다. 당시 민길은 진재학(서울대 77학번)이 팀장이었고, 백현기(국민대 74학번)가 팀원으로 있었고, 김희상(성균관대 73학번)이 중앙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와 있었다. 선택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과 인연을 이어갔다. 선택은 주로 경제관계 정세분석을 담당했다. 선 야마토게임 택은 민길팀에서 1985년 말까지, 대략 13호 발행 때까지 일했다.
1985년 6월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구속되고, 9월 초에 김근태 의장과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이 구속되면서 민청련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최민화 부의장 등 간부 5명이 추가로 구속되고, 김희택, 박우섭 등 간부들 모두에게 수배령이 떨어져 민청련은 공개적인 활동이 중단되고,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민길도 사실상 발행 중단이 되었다.
활동 중단으로 답답하게 지내던 중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청련에 대한 탄압이 풀리고 9월에 총회를 열어 김희택 의장을 중심으로 공개활동이 복원되었다. 민청련은 12월 대통령선거 때까지 지역지부 건설과 선거국면의 정치투쟁이라는 내외 양면에서 적극적인 황동을 펼쳤는데, 선택은 이때 공개적인 직함을 맡지는 않았지만 다시 회원으로서 민청련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가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의 당선으로 끝나자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던 민통련이 혼란에 빠졌다. 지도부가 총사퇴했고, 산하조직도 분열되었으며, 실무진도 대거 그만두어 공백이 생겼다. 민청련도 김희택 의장 등 의장단이 총사퇴하고 2월에 총회를 열어 김성환 의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됐다.
▲ 2012년 3월 인재근 선배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 김선택(중앙)은 민청련동지들과 함께 응원 방문했다.
ⓒ 민청련동지회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 천생 배필 권미혁
이때 선택은 민청련보다 상위의 연합단체인 민통련을 정상화하는 일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통련의 중간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등은 아직 감옥에 있었고, 정책실장 대행 역할을 하던 김병곤은 구로구청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였다. 이창복 의장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민청련의 '삼택'이 나섰다. 김희택이 민통련 사무처장으로, 김선택이 정책실 차장으로, 권형택이 사무차장으로 이창복 의장을 모시고 민통련 재건에 나섰다. 김선택은 또한 통일운동에 몰두하고 있던 문익환 목사를 모시고 민통련 통일위원회를 꾸렸다. 통일위원회에는 문 목사 이외에도 김낙중, 노중선, 전창일 선생 등이 있었다.
그러다 1988년에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가 출소하면서 새로운 연하단체 조직 논의가 일어나 결국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창립했다. 선택은 민통련의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새로운 연합체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셈이었다.
1988년 10월 선택이 민통련에 근무할 때였다. 민청련 후배 이정심이 선택을 찾아와 물었다. "형 장가갈 거야?" "야! 그러지 않아도 집에서 장가가라고 난리야." "알았어요." 그러고나서 얼마 안 있어 11월 3일 이정심이 성대 앞 장미다방에서 권미혁과 자리를 마련했다. 미혁도 민청련 여성부 활동을 했으니 전부터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당시 미혁은 이화여대 77학번으로 선택보다 4살 아래였고, 민청련 여성부를 나와 여성민우회에서 상근으로 여성운동을 하고 있었다. 첫날은 술 한 잔 하고 헤어졌고, 그 후에 선택이 한 두 번 더 만나보니 '말이 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선택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우리 더 만나면 소문이 날 텐데 나이 들어서 무슨 창피냐. 난 당신이 좋으니까. 결혼합시다."
그랬더니 미혁이 깜짝 놀라 "무슨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두 번 더 만났는데 한 달을 못 채우고 11월 말에 미혁으로부터 좋다는 답을 들었다.
선택과 미혁은 12월 초에 만나서 결혼하기로 최종합의하고 한 달간 준비한 끝에 1989년 1월 15일 문익환 목사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문익환 목사는 친필로 쓴 글을 표구한 액자 2개를 선물로 주었다. 선택 미혁 부부는 미아리 선택의 집에서 신접살림을 꾸렸다.
▲ 신혼 초 김선택 권미혁 부부
ⓒ 민청련동지회
아내를 위해 '내조'한 민주적 남편
미혁은 건강이 안 좋아 결혼 초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동안 여성운동에 몰두하느라 몸을 돌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쉴 틈이 없이 활동에 매진했고 결국 그 바람에 첫 애를 임신했으나 유산을 했고, 그 유산 후유증에 오래 시달렸다.
선택은 선택대로 신혼 초에 전민련 창립식이 있어, 민통련을 정리하고 새로운 단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민련은 창립된 지 3달이 채 되지 않아 89년 4월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으로 정부당국으로부터 된서리를 맡게 된다. 문익환 목사뿐만 아니라 전민련 간부 이부영, 이재오, 김근태 등이 모두 구속되어 전민련이 기능마비 상태에 빠졌다. 김선택은 이번에도 이창복 공동대표를 모시고 장준영, 권형택 등과 함께 전민련을 지키고 이끌고 나가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선택은 모교 후배 김기설의 투신 항거와 그에 뒤이은 유서대필사건에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운동권'의 뒤치다꺼리 전담요원 역할을 했다. 선택의 이러한 남 뒷바라지 잘하는 기질은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아내 권미혁이 여성운동가 할당의 일환으로 민주당 비례대표에 나가게 되었다. 선택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정치에서 여성의 발언권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여서 미혁의 정계 진출을 적극 응원했다.
당시 국회의원 비례대표는 중앙에서 후보자의 당선 가능성 번호를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자끼리 경선하여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투표에 의해 순번이 정해지는 방식이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미혁은 11번을 받아 당선안정권 내에 들었다. 이 과정에서 선택의 헌신적인 노력이 큰 힘이 되었다. 마침내 2016년 5월 미혁은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입성했다.
선택의 뒷바라지 대상은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백송을 지극히 사랑하여 묘목을 들여다 정성껏 가꾸었다. 그리고 자란 묘목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무 뒷바라지까지 해준 선택이었다.
발병, 헌신적 간호 속에 세상을 떠나다
평생 남을 위한 일만 하다가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일까. 선택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2016년 무렵 꽃가루 알러지가 심해서 천안의 한 병원에 갔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미혁이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서울대병원에 예약을 해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서울대병원에서는 '상태가 심각하다.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병명이 대동맥류라고 하는데 뇌동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어 그 약한 부분이 터지면 즉사할 수 있는 위험한 병이었다. 게다가 선택은 세 군데나 대동맥류가 생겨 있었고, 모두 70% 이상이 막혀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8월에 날을 잡아 18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선택은 중환자실을 나와 의식을 회복하고, 통원치료를 하며 몇 달간 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다.
그런데 몇 달 후 심한 장출혈로 병원에 재입원했다. 응급조치를 받아 겨우 장출혈이 치료되자 이번엔 폐렴이 찾아왔다. 결국 선택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는 치료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아내 미혁은 선택이 좀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고향 근처의 병원으로 옮기고, 직접 자신이 온 힘을 다해 간호했다. 이때 선택의 선후배 동지인 김재승, 장준영, 정경연, 노재익, 서경미 또한 매일 선택의 곁을 지키며 호전을 빌었다.
한때는 상태가 호전되어서 미혁이 선택을 휠체어에 태우고 문익환 목사 자택에 개관한 '문익환 통일의 집'을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민청련 동지 장영달, 이명식을 본 선택은 하염없이 울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동지들을 보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러나 운명은 결국 평생 남을 위해 뒷바라지 해온 선택을 뒷바라지 해주지 않았다. 2020년 9월 18일, 선택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운명했다. 선택의 유해는 문익환, 김근태, 김병곤 등 민주화운동의 선배들이 묻혀 있는 마석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문익환 목사님 묘소 바로 옆에 있는 선택의 묘 앞에는 함세웅 신부님이 친필로 쓴 '맑은 영혼 김선택'이라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있는 김선택 묘. 문익환 목사 묘 옆이다.
ⓒ 민청련동지회
맑은 영혼, 김선택
김선택 한 번도 관직에 앉아본 적이 없이 순수 재야의 길을 걸었다. 항상 원칙을 중시했고, 운동이 지향하는 철학을 삶의 마지막까지 견지하려고 했다. 그 철학의 핵심은 '민주주의'였다. 그래서 아내 미혁이 바라보는 남편 김선택은 '모든 면에서 민주적인' 사람이었다.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고 늘 대화로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선택은 아이를 무척 좋아해서 아이를 여럿 낳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혁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자, 미혁이 상처 받을까봐 일체 그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선택은 소를 키우는 농부처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새벽형 인간이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새벽 3, 4시면 일어나 주위 사람을 두들겨 깨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도 그의 아기 같은 심성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맑은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 심성을 다스리는 공부도 많이 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불경을 사경하고, 경전을 읽고 공부했다. 그래서 선택이 평생 친형님처럼 모시고 의지했던 장준영은 선택을 "좋은 친구이면서 좋은 스승 같은 사람, 내 잘못을 비춰보는 거울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면서도 때로 야단도 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선택은 주변의 선후배들에게 사랑과 아낌을 듬뿍 받은 사람이었다. 순천향병원 입원 기간 3년 반 동안 매일 빠짐없이 누군가가 선택을 병문안 왔다. 친지도 있었지만 주로 선후배 동료들이었다. 이해찬 전 장관, 박원순 시장도 면회를 왔고,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경우 2번이나 면회를 왔다. 그래서 가족들은 가슴으로 느꼈다.
'내 동생, 우리 오빠가 정말 잘 살았구나'.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청춘을 바치고, 때 이르게 세상을 떠난 민청련 두꺼비들 김근태, 이을호, 김병곤, 백완승, 이범영, 박혜숙, 박문숙, 최민화, 김선택 9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이로써 민청련두꺼비열전 1부를 마칩니다. 아직도 민주의 제단에 바쳐진 많은 무명의 영혼들이 있습니다. 더 잘 준비해서 2부로 돌아오겠습니다. 기자 admin@seastorygame.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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